공주 영명 학교 

이번 이번에는 공주 선교 유적지에 방문했다. 광주 스테이션 만큼 크고 다양한 유적들이 남아있지는 않았지만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선교사님들이 우리나라에 남겨두신 흔적들을 찾고, 그 의미들을 알아가면서 나의 상황과 상태를 돌아보게 되었고, 정말 감사하다는 마음이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진정한 크리스천은 어떤 사람이며, 어떤 행동을 하며 살아가고, 인생의 목적을 어디에 두는가?' 라는 질문의 답을 직접 삶으로 살면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선교사님들의 삶을 보며 많은 깨달음을 얻은 시간이었다  가장 처음에는 윌리엄스 선교사님이 1906년에 설립하신 '영명학교'로 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 하나 짓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나 생각하게 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 현장에 가서 직접 보고 경험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다. 항상 신기하다. 그때 지어진 학교가 아직까지도 교육에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되게 의미가 많은 것 같다. 그리고 나라도 잘 신경 쓰지 않았던 학생들의 교육을 타국에서 오신 선교사님들이 붙잡고 있다는게 참 새롭게 느껴졌다. 아무 상관 없는 나라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섬기고 있다는게 너무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도 아니고, 아는 사람들도 아니고 어딘지도 모르는 나라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건다니,,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많은 선교사님들이 정말 존경스러웠다.   영명학교에서 길을 따라 쭉 올라가니 선교사님의 묘역이 있었다. 고향도 아닌 낯선 땅에서 생을 마감한다는 사실은 너무 무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것 같다, 심지어 묘역도 고향이 아닌 우리 나라에 있다. 갑자기 든 생각이지만 선교사님들은 죽어서도 자신의 가족들, 친구들, 주변 인들이 찾아오지 못하는건가? 그럼 정말 슬플 것 같다. 선교사님들은 어떤 용기로 죽을 각오까지 하면서 조선이라는 땅에 찾아오셨을까? 그분들의 용기와 사명감과,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는 그 충성심이 정말 멋있고, 대단하다고 느낀다. 나도 앞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순종할 수 있는 그런 용기와 믿음을 갖고싶다.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그 어떤 상황에 있어도 고민하지 않고 지체없이 하나님께서 내게 명하신 일을 수행하고 싶다.  이번 공부는 많은 것을 생각해내게 했으며, 감사의 마음이 더 피어났고, 다시 한 번 선교사님들을 리스펙 한 것 같다. 이번에는 공주 선교 유적지에 방문했다. 광주 스테이션 만큼 크고 다양한 유적들이 남아있지는 않았지만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선교사님들이 우리나라에 남겨두신 흔적들을 찾고, 그 의미들을 알아가면서 나의 상황과 상태를 돌아보게 되었고, 정말 감사하다는 마음이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진정한 크리스천은 어떤 사람이며, 어떤 행동을 하며 살아가고, 인생의 목적을 어디에 두는가?' 라는 질문의 답을 직접 삶으로 살면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선교사님들의 삶을 보며 많은 깨달음을 얻은 시간이었다  가장 처음에는 윌리엄스 선교사님이 1906년에 설립하신 '영명학교'로 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 하나 짓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나 생각하게 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 현장에 가서 직접 보고 경험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다. 항상 신기하다. 그때 지어진 학교가 아직까지도 교육에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되게 의미가 많은 것 같다. 그리고 나라도 잘 신경 쓰지 않았던 학생들의 교육을 타국에서 오신 선교사님들이 붙잡고 있다는게 참 새롭게 느껴졌다. 아무 상관 없는 나라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섬기고 있다는게 너무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도 아니고, 아는 사람들도 아니고 어딘지도 모르는 나라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건다니,,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많은 선교사님들이 정말 존경스러웠다.   영명학교에서 길을 따라 쭉 올라가니 선교사님의 묘역이 있었다. 고향도 아닌 낯선 땅에서 생을 마감한다는 사실은 너무 무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것 같다, 심지어 묘역도 고향이 아닌 우리 나라에 있다. 갑자기 든 생각이지만 선교사님들은 죽어서도 자신의 가족들, 친구들, 주변 인들이 찾아오지 못하는건가? 그럼 정말 슬플 것 같다. 선교사님들은 어떤 용기로 죽을 각오까지 하면서 조선이라는 땅에 찾아오셨을까? 그분들의 용기와 사명감과,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는 그 충성심이 정말 멋있고, 대단하다고 느낀다. 나도 앞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순종할 수 있는 그런 용기와 믿음을 갖고싶다.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그 어떤 상황에 있어도 고민하지 않고 지체없이 하나님께서 내게 명하신 일을 수행하고 싶다.  이번 공부는 많은 것을 생각해내게 했으며, 감사의 마음이 더 피어났고, 다시 한 번 선교사님들을 리스펙 한 것 같다.에는 공주 선교 유적지에 방문했다. 광주 스테이션 만큼 크고 다양한 유적들이 남아있지는 않았지만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선교사님들이 우리나라에 남겨두신 흔적들을 찾고, 그 의미들을 알아가면서 나의 상황과 상태를 돌아보게 되었고, 정말 감사하다는 마음이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진정한 크리스천은 어떤 사람이며, 어떤 행동을 하며 살아가고, 인생의 목적을 어디에 두는가?' 라는 질문의 답을 직접 삶으로 살면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선교사님들의 삶을 보며 많은 깨달음을 얻은 시간이었다  가장 처음에는 윌리엄스 선교사님이 1906년에 설립하신 '영명학교'로 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 하나 짓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나 생각하게 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 현장에 가서 직접 보고 경험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다. 항상 신기하다. 그때 지어진 학교가 아직까지도 교육에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되게 의미가 많은 것 같다. 그리고 나라도 잘 신경 쓰지 않았던 학생들의 교육을 타국에서 오신 선교사님들이 붙잡고 있다는게 참 새롭게 느껴졌다. 아무 상관 없는 나라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섬기고 있다는게 너무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도 아니고, 아는 사람들도 아니고 어딘지도 모르는 나라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건다니,,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많은 선교사님들이 정말 존경스러웠다.   영명학교에서 길을 따라 쭉 올라가니 선교사님의 묘역이 있었다. 고향도 아닌 낯선 땅에서 생을 마감한다는 사실은 너무 무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것 같다, 심지어 묘역도 고향이 아닌 우리 나라에 있다. 갑자기 든 생각이지만 선교사님들은 죽어서도 자신의 가족들, 친구들, 주변 인들이 찾아오지 못하는건가? 그럼 정말 슬플 것 같다. 선교사님들은 어떤 용기로 죽을 각오까지 하면서 조선이라는 땅에 찾아오셨을까? 그분들의 용기와 사명감과,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는 그 충성심이 정말 멋있고, 대단하다고 느낀다. 나도 앞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순종할 수 있는 그런 용기와 믿음을 갖고싶다.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그 어떤 상황에 있어도 고민하지 않고 지체없이 하나님께서 내게 명하신 일을 수행하고 싶다.  이번 공부는 많은 것을 생각해내게 했으며, 감사의 마음이 더 피어났고, 다시 한 번 선교사님들을 리스펙 한 것 같다.


종교개혁

  1. 면죄부 판매 및 성직매매 → 도덕적 타락

- 베드로 대성전을 건축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교회에서 ‘면죄부' 라는 것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면죄부는 돈을 내고 사는 것으로, 면죄부를 구입함으로서 죄를 사해주고 천국으로 갈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 외에도 교회에서 성직매매가 종종 일어났으며, 일부 성직자들은 그들의 교리를 지키지 않고, 의무를 다하지 않는 도덕적 해이가 나타났다

  1. 르네상스로 인한 변화 → 지적인 요인

- 르네상스는 유럽의 지적인 문화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대표적으로 인문주의자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에 뒤따른 새로운 학문열은 헬라어로 작성된 바울 등의 사도들과 그들의 제자들인 속사도들의 기록과 더불어 초대교회의 교의를 세워 교회의 아버지로 존경받는 교부들의 신학과 성서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 연구를 장려했으며, 종교개혁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하여 주었다. 중세의 지식사회는 성서적 인문주의의 세찬 도전을 받기에 이르렀다.

  1. 사회 구조의 변화 → 사회적 요인

- 십자군 전쟁 이후 봉건 사회가 무너지면서 사회의 구조에 변화가 생겨나게 되었다. 국가주의가 등장하면서 국가가 교회를 지배하게 되었고,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로 인해 교황권이 몰락하면서 교회의 개혁이 가속화 되었다


  • 진행과정

- 마인쯔의 대주교가 된 알브레히트는 후거가로 부터의 대부를 갚기 위해 교황으로부터 변죄부를 얻어 발행하고, 그 면죄부를 판매함으로부터 사건은 시작된다- 루터는 면죄부 판매를보고 교회의 세속화와 타락을 지적했다. 그래서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교회 문 앞에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지적하는95개조 반박문을 붙였다. - 면죄부를 판매했던 테첼은 추방당했고, 면죄부에 대한 강력한 항의가 독일 전역에 퍼졌다. - 교황은 루터의 주장을 철회하도록 어거스틴 수도원의 총사령 가브리엘 델라 볼타에게 지시했으나, 루터는 보다 강력하게 자신의 주장을 내세웠다- 루터는 자기의 견해가 허위임이 성경에 의해 증명되지 않는한 철회하지 않겠다고 했다. 또한 그는 신앙과 도덕에 있어서는 교황의 권위가 최종적 권위라는 것을 주장한다.- 라이프치히에서 교황청의 신학 교수인 에크와 논쟁을 벌이게된다. 그 이후로도 비텐베르크로부터 파견된 많은 사람들이 논쟁이 벌어지는 곳에 참석했고, 그들은 면죄부를 포함한 가톨릭 교리에 대해 논쟁을 펼치게 된다- 1520년 11월 로마 교회는 루터의 신학을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규정하고, 60일 이내에 철회하지 않으면 루터를 이교도로 간주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루터는 이런 교황의 선언문을 공개적으로 불태운다- 루터는 3개의 논문을 발표한다. 첫번째, ‘독일국민의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 두번째, ‘교회의 바빌론 유수’ 세번째, ‘기독교인의 자유’ 그리고 루터는 ‘독일에게 고함’ 에서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한다- 1521년 5월 25일루터는 보름스 칙령으로 파문당한다.-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에 소환된다. 여기에서 루터는 자신의 견해를 철회할 수 없고 본인의 견해를 굳힌다. "Hier stehe ich. Ich kann nicht anders. Gott helfe mir. Amen.“ “나는 여기에 확고부동하게 서있다. 나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 의회를 구성한 군주들과 선거인들이 교황에 대해 적대적이어서 루터에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 후, 보름스 의회에서 돌아오는 루터를 작센의 선제후가 납치한 것으로 가장해서 그를 바르트부르크 성에 피신시킨다- 칼 5세는 루터를 범죄자로 수배한다. 루터는 작센 선제후의 도움으로 안전하게 피신하여 그 곳에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데 힘쓴다- 루터는 목회를 하면서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를 사용했다. 또한 전통적인 성직 제도를 배격했으며, 수도원 제도 폐지와 목회자의 결혼을 주장했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벽을 허물려고 한 것이다.

  • 결과

- 종교적 암흑시대로 불리는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 시대는 종교개혁을 통해 막을 내리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중세교회 안에 만연했던 비성경적인 모든 것을 제거하고 성경적인 교리, 예배, 교회정치를 회복하게 했다. 또한 중세교회의 모든 인간적인 전통과 권위는 사라지고 성경 중심의 신앙과 생활이 교회 안에 회복되었다. 또 계급 구조적인 사회에서 성경이 제시하는 평등과 자유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교황을 정점으로 하나를 이루어 왔던 서방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 루터교회, 개혁교회, 앵글리칸교회, 신령주의 그룹의 교회의 다섯 부류로 나뉘었다.

  • 의의

- 종교개혁은 단순히 교회의 개혁에 그친 것이 아닌, 지리상의 발견을 이루었으며 인문주의 운동과 함께 시작되었기 때문에 중세의 카톨릭적인 보편질서를 깨고 유럽 제국으로 하여금 문화, 정치,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민족적인 독자성을 갖게 하였다. 따라서 독일의 경우, 그들의 민족의식을 각성시켜 독일이라는 나라를 성립시키는 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독일 민족사에도 중요한 역사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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