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영명학교

저번에 갔었던 광주와는 다르게 공주는 영명학교 그리고 선교사님들의 묘로 작게 구성되어있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하지만, 크기와는 상관없이 그 안에 담겨있는 마음이 참 따듯해지는 공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높은 지대에 위치해있는 영명학교를 통하여 다시 한번 mission station의 의의와 이유에 대해서 깨닫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타지로 건너온 선교사님들이 가장 그들다울 수 있었던 곳이라고 생각하니 참 마음이 죄송하기도 하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올라가서 영명동산 선교사 유적을 보게 되었을 때는 참 슬펐습니다. 저희 아버지 생각도 나면서 이 먼 곳까지 와서 아이들을 먼저 보내고, 계속해서 그 땅의 사람들을 위해 섬긴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한 그들의 노력에 열렬한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이번 공주트립을 통하여 다시 한번 선교사님들의 노고를 마음에 새길 수 있었고, 앞으로 더 많은 선교유적을 직접 방문해 보고 싶어지게 된 것 같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 1483년 11월 10일 ~ 1546년 2월 18일


종교개혁의 시발점

  • 성직의 매매와 면죄부의 판매로 인해 불신과 비판이 일어났다. 
  • 교황권의 쇠퇴 : 아비뇽 유수(1309-1376)와 대분열(1378-1417)로 인해 교황의 권위 실추
  • 신비주의자들과 초기 개혁가들의 영향. 성사나 성직자의 기적과 의례보다 깊은 믿음과 경건함 만이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했다.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강제적인 면죄부 판매는 루터의 신앙을 근본적으로 흔들었다. '돈으로 구원을 살 수 있다'라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순응할 수 없었다. 루터는 자신이 가르치고 돌보는 많은 사람에 관한 목회적 양심과 책임으로 설교 중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 전개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교회(Wittenberg Castle Church)의 문 앞 ‘면죄부판매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95개조 반박문(Ninety five Theses)을 붙였다. (근데, 반박문은 라틴어로 쓰여져 일반인은 읽을 수 없었다고 함) 이는 면죄부 판매에 대한 루터의 반박문은 교황의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1518년 초 교황은 루터의 주장을 철회하도록 어거스틴 수도원의 총사령 가브리엘 델라 볼타에게 지시했으나 루터는 강력하게 자신의 주장을 주장하였다. 

카에탄 추기경과의 면담;1518

로마의 재판에 출석을 거부한 루터는 당시 가장 권위있는 신학자이며 추기경인 카에탄 추기경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만났다. 이 자리에서 추기경은 기대한 결과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루터는 자기 입장을 분명히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루터는 자기의 견해가 허위임이 성서에 의해 증명되지 않는한 철회하지 않겠다고 한다. 또한 그는 신앙과 도덕에 있어서 교황이 최종적 권위라는 것, 그리고 믿음에 없이 행하는 성례의 효용을 부인했다. 

라이프치히 논쟁; 1519

루터는 1519년 6월 27일 라이프치히에서 교황청의 신학 교수 에크와 면죄부를 포함한 가톨릭 교리에 대한 논쟁에 자신의 신학이 로마 교회와 화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비텐베르크로부터 파견된 많은 사람들이 논쟁이 벌어지는 곳에 참석했고, 두 대학교의 신학자들, 게오르게 공작, 교회와 국가의 고위직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논쟁은 시작되었다. 에크는 루터가 위대한 콘스탄츠 공의회(1414~18)의 권위를 의심하며, 공의회에서 이단자로 선고받고 화형당한 보헤미아의 개혁자 얀 후스의 전제들 가운데 몇 가지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몰아세웠다. 라이프치히는 보헤미아에 대해 극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독일 지방이어서 그곳에서 논쟁을 갖게 된 것은 루터에게 크게 불리했다. 

루터의 파문1520년 11월 로마 교회는 루터의 신학을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규정했다. 60일 이내에 철회하지 않으면 루터를 이교도로 간주할 것이라고 선언하였지만, 1520년 12월 10일 루터는 교황의 선언문을 공개적으로 불태웠다. 1521년 5월 25일루터는 보름스 칙령(Edict of Worms)으로 파문당했다.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3개의 주요 논문을 발표하였고, ‘독일국민의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Anden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에서 성직자들의 부패와 부정을 개탄하고 교회의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여 로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것을 촉구하였다. ‘교회의 바빌론 유수(De captivitate Babylonica ecclesiae praeludium)’에서 가톨릭의 의례적인 성사제도를 비판했다. ‘기독교인의 자유(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에서 선행과 성사가 아니라 내면적인 신앙생활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후, 루터의 ‘독일귀족에게 고함’에서 만인사제설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칼 5세는 루터를 범죄자로 수배하였기에 작센의 선제후는 보름스 의회에서 돌아오는 루터를 납치한 것으로 가장하여 그를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피신시켰다. 루터는 이후 작센 선제후의 보호아래 안전하에 역사적인 신약 성서의 독일어 번역 작업에 몰입하였다. 이는 라틴어로 쓰여졌던 성서를 일반대중들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성직자와 평신도들 간의 장벽을 허무는 종교개혁사의 큰 획을 그은 것이다. 

이후 1522년 기사전쟁, 1524년 농민반란을 거쳐 1529년 슈파이어에서 제국 회의가 다시 열렸다. 이 회의에서 가톨릭이 우세한 지역에서 루터파의 종교적 자유가 제한되는 결정이 내려졌다. 루터파 제후들은 이 조치에 대해 항의하는 항의문(protestantation)을 제출하였다. 여기서 개신교인들을 의미하는 protestant가 생겨나게 되었다. 

슈마칼덴 전쟁

1531년, 루터파 진영은 슈말칼덴 동맹이라는 군사동맹체를 결성하여 카톨릭에 대항하였다. 그후 1546년, 레겐스부르크 제국회의에서 카를5세는 회장에 나타나지 않은 슈말칼덴 동맹의 수장,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와 헤센 방백 필립에게 제국 추방령을 내리며 슈마칼덴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카를 5세는 1547년 뮐베르크다리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며 제1차 슈말칼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카를5세는 곧장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를 소집하였다. 모든 제후들에게 카톨릭 개종과 그가 작성한 루터파 이단 판정문에 서명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마그데부르크가 서명을 거부하였고, 새로운 작센 선제후인 모리츠가 마그데부르크와 앙리2세와 동맹을 맺고, 카를5세를 급습하였다. 이로 인해 제2차 슈마칼덴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하지만, 1552년 파사우에서 페르디난트와 협정을 맺고, 종료된다. 3년 뒤인 1555년에 파사우 협정을 발전시킨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회의가 개최되어 루터파 개신교의 종교자유가 허락되었다. 

루터는 제1차 슈말칼덴 전쟁이 발발되는 시작되는 1546년에 자신의 고향 아이슬레벤에서 숨을 거둔다. 

의의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경이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심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개혁이었다. 이를 통해 일반인들도 성서를 읽고 공부할 수 있었으며 개신교(Protestant)라고 하는 카톨릭과 다른 차원의 새로운 기독교를 탄생시켰다. 


기도가 된 편지

기도가 된 편지는 부제가 ‘한국을 사랑했던 프랭크 윌리엄스 선교사의 편지’인만큼 프랭크 윌리엄스 선교사님이 살아내었던 한국 선교의 삶에 대해서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는 총 169통의 편지를 작성하였으며 이는 모두 한국을 위한 편지임을 알 수 있다. 각 편지는 정말 절실하기도, 당당하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을 위한 그의 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인 것 같다. 특히, 각 편지의 공통점은 미국 교회에게 금전적 지원을 바란다는 것인데, 이 지원에는 그 자신을 위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하여 한국 선교의 실태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 수 있었고, 선교사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 선교는 무엇인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평생을 목회자의 자녀 그리고 선교사의 자녀로서 살아오며 그들이 어떤 삶을 사는 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내가 아버지의 기억이 많이 없는 것과 같이 다른 자녀들도 헌신의 이면을 몸소 겪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 중에서도 나의 아버지는 늘 바쁜 사람이었다. 평일에는 얼굴 한번을 볼 수 없었으며 집에 계셔도 늘 설교준비를 하시거나 또 새벽에 교회에 나가시기 위해 낮에 에너지를 비축하셨기에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정말 하늘의 별따기와도 같은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를 마음놓고 볼 수 있는 주일날, 교회 단상에 선 아버지를 보기 위해 어린이예배를 마치고 2층으로 뛰어 올라가 설교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훔쳐볼 때도 참 많았던 것 같다. 또한, 그가 선교사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어 그가 시한부가 되었을 때도, 여러번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도, 저 멀리 불가촉천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도 선교사로서는 참 대단한 일이었지만, 가족으로서는 늘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내가 직접적으로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 책을 통해 선교사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그들의 ‘선교'란 무엇인지에 대해 더 배울 수 있었다. 나는 늘 내가 피해자라고만 생각이 되었는데, 어렴풋이나마 선교사들의 열방을 향한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아닌 사랑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셨듯이 그 사랑을 온전히 열방을 향해 흘려보내는 것이었다. 윌리엄스 선교사님의 편지들은 정말 다 절절한 사랑이 묻어나오는 것을 내가 읽을 수 있었듯이 다른 선교사님들의 마음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기에 이제는 선교사로서의 아버지의 삶을 인정하고,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아버지로서는 빵점이었지만, 선교사로서는 200%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에 나는 우리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참 많이도.

Comments
* The email will not be published on the website.
I BUILT MY SITE FOR FREE US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