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영명학교
일제의 침탈로 국운이 저물어가던 이 땅에 예수님의 복음을 들고 선교적 삶을 드리기로 한 윌리엄스 선교사님께 우선 감사를 표합니다. 죽음이 늘 가까웠던 그 시대에 선교사의 터전인 영명학교는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내가 그곳에 들어갔을때, 단번에 내 영혼이 선교사님들이 남긴 평화로움을 느낄수 있었다. 그들은 지금과는 다르게 늘 신실하셨고, 악의 세력에 무너지지 않으셨다. 아들과 딸을 고향도 아닌 타국에서 잃는 아픔이 부모된 자들로서 감당하기 벅찼으나,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지켜내셨다. 나는 그시대의 선교사의 삶을 묵상하였다. 도대체 믿음이 얼마나 굳건하였길레 죽는 순간까지 견디다 순교를 하시는걸까? 그저 본국에서 풍요롭게 살수도 있었을 엘리트 계층분들이 어째서 치료도 받지도 못하는 이 땅의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하셨던 걸까? 나는 예수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을 섬기며 살아가는 삶이란 마음을 온전히 내어주어야 하는 책임을 가져야한다. 예수님은 책임을 뛰어넘어 온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죄인된 나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방시켜주셨다. 그렇다면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던 한국인은 얼마나 큰 상심과 고통가운데 살고 있었을까? 나라와 임금을 잃은 백성이 통곡하는 마음을 나는 헤아릴 자격이 없다. 상심하는 그들에게 자유를 주고자 선교사님들은 육체를 포기하고 복음을 전하셨고 그 복음은 나의 마음까지 다가왔음을 느낀다. 비록 자식을 잃는 아픔을 겪으셨으나 이제는 선교사님들이 땀과 수고로 전해주신 복음을 들고 우리는 당신들과 똑같이 걸어온 길을 걷습니다. 선교적 삶을 산다는 것은 이 땅에서 받을 상이 작을수 있으나, 천국에서 누릴 상은 헤아릴수 없음을 뜻한다. 한 영혼의 회심이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므로 복음을 들고 우리는 세상에 나아갑니다.   


종교 개혁

종교개혁의 원인

  1. 무지와 미신적 신앙
  2. 교회의 재정적 부패 및 성직자들의 도덕적 타락
  3. 면죄부 판매사건


무지와 미신적 신앙: 1200년 경에는 유일한 표준으로 라틴어 성경 만을 사용하고, 일반 성도는 성경을 소유하거나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진리를 바로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이는 자연히 고위 성직자의 권위를 강화시켰다.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함 에서 오는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성경해석 권한은 교황에게만 있었다. 따라서 성경적 기독교는 사라지고  이러한 일반 성도들의 성경에 대한 무지는 영적무지로 이어졌으며 성도들은 미신적 행위를 통해 대리만족을 얻고자 했다.

교회의 재정적 부패 및 성직자들의 도덕적 타락: 13세기 성직을 가진 자가 사망할 경우에 교황이 마음대로 성직록을 재할당할 수 있다는 교회법이 제정되면서 가속화 되었다. 이에 교황의 교회 재정에 대한 입지가 강화되자 교황들은 다양한 세금 제도를 고안하였고 이러한 재정적 부패는 교황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일반 사제들도 돈의 노예가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 성직자의 도덕적 부패상은 보편적은 현상이었음으로 평신도들은 성직자의 축적을 묵인할 정도였다. 이처럼 성적자들의 도덕적 성적타락을 사회적 종교적 문제로 대두되었고 이는 종교개혁의 중요한 원인들 중 하나를 제공하게 되었다.

면죄부 판매: 당시 가톨릭의 부패와 심각한 타락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자 종교개혁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이 무렵 교황청과 가톨릭 교회는 부패한 생활로 재정적으로 적자에 처해졌다. 그런데도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기 위해 면죄부를 팔았는데 이때 사제들은 사람들에게 누구든지 회개하고 기부금을 내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돈이 이 상자 속에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들어가는 순간 영혼은 지옥의 불길 속에서 튀어나오게 됩니다 라고 설교했다. 이로써 종교개혁의 원인 끝판왕을 찍었다.

진행과정 

1521년 보름스 회의에서도 마찬가지로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를5세로부터 같은 요구를 받았으나 거부함으로써 결국 교황에게 파문당했다. 1517년 10월31일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 문에 95개 논제를 게시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것이 종교 개혁의 시작이 되었다.

당시상황: 당시 교회는 형식적이고 겉치레로 운영되면서 일반 대중들도 이미 그 폐단을 인식하기 시작 →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교황은 출신 가문의 세력 확장과 자신을 드러내는데만 열중하고 전 국토의 3분의1을 소유할 정도로 부유했던 독일 교회는 부와 권력에 집착하면서 당시 유럽인들은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 모두가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음. 하지만 이러한 문제에 대해 모두가 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누구 한 사람 앞장서는 사람이 없었는데 당시 교회의 권력에 맞선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루터의 등장

이러한 가운데 교회의 실정을 바로 잡아야 한다며 일어난 사내가 있었는데 그는 바로 마틴 루터였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독점하려는 로마 교황청을 부정하고 성도들은 누구나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과 직접 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음.

루터의 주장: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순간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는데, 이는 성소와 지성소,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막이 무너진 것으로써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만 갖고 나가면 하나님과 직접 대면할 수 있다.

그 후

루터는 1517년10월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일종의 항의문인 (95개조 의견서)를 내걸면서 이 항의문은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유럽 전역에 소문이 퍼지기 시작 → 특히 종교개혁의 양대 산맥이였던 스위스의 울리히 츠빙글리는 교회 개혁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스위스 내 신,구교간의 종교전쟁으로 비화되고, 끝내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결말 및 의의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퍼져나가 16~17세기 유럽 전역에 심겨졌다. 대표적으로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성경만을 신앙의 근거로 삼는 개신교가 등장하여 교회 내에 있던 비 성경적인 모든 예배의 요소를 제거하고 성경적인 교리와 예배가 회복되었으며, 특히 예배는 더욱 단순해지면서 하나님의 말씀 즉 설교에 더욱 초점이 맞춰졌다. 또한 종교적 변화 뿐 아니라 유럽 중세의 봉건적 잔재를 떨어내며, 근세를 구분 짓는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으며, 성직과 관련된 일만 귀하고 다른 일은 천하다는 (성속이원론)이 철폐되면서 근대 자본 주의에 기반이 되는 사상적 바탕을 제공하기도 했다.


기도가 된 편지

대한민국을 사랑했던 프랭크 월리엄스 선교사님의 편지이다.  23세에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으로 파송되었는데 무려 34년간 충청지역 선교책임자, 공주 영명학교 교장으로 한국의 민족 교육을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했던 선교사님의 삶은 숭고했다. 자국에 남아서 누릴수 있었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다섯 자녀 중 두 딸을 풍토병으로 잃어 선교지에 묻어야 하는 고난 중에서도 선교사님이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라는 말씀이었다. 34년간 쓰여진 169통의 선교편지 속에는 선교사로서의 복음 전파 사역은 물론 고난과 희생의 가족사 뿐만 아니라 한국의 근현대 역사까지 생생하게 살아있는데, 그중에서도 일제 탄압에 맞서 민족교육을 시켜온 결과, 충청남도 3.1독립운동은 선교사님의 제자들과 선교사님이 세운 영명학교 교사들이 주도했고 광복 후에는 미군정 농업정책 고문관으로 복음전파는 물론 우리나라 교육과 농업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완전히 쓰임받기를 원하며 순종했음을 내가 깨닫는다. 130여년전, 우리 땅에 첫 발을 내디디며 뿌린 내린 2.000여명 선교사들의 주님 사랑이 열매 맺어 이젠 한국이 171개국의 2만7천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대국이 되었다. 그 시작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 땅과 민족을 위해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한 생애의 전부와 소중한 가족의 생명까지 바친 숭고한 사랑을 다시 한번 이 책을 통해 가슴에 새깁니다. 또한 이 사랑이 우리 아이들, 다음세대를 통해 전승되고 흘러나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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